한국의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참여, 한·EU 연구협력의 전환점 될까? 관련 KDI 경제정보센터에서 발간하는 월간 '나라경제 4월호, 세계는 지금' 코너에 기고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부터 EU의 주요 연구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에 준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준회원국 지위 획득은 단순한 연구 참여 확대에 그치지 않고 질적으로 높은 연구성과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AI와 양자기술 분야에서 한·EU 공동연구의 성과가 높게 나타났다.
최근 EU의 정책 담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경쟁력(competitiveness)’이다. 이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격화와 에너지 위기, 공급망 재편이 맞물리면서 유럽산업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EU는 여전히 과학기술 강국으로서 글로벌 연구개발(R&D) 투자의 18%를 담당하고 세계 상위 피인용 논문의 20% 이상을 배출하며,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효율 분야에서 글로벌 특허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 AI, 플랫폼산업, 벤처투자 생태계에서는 미국과 중국에 뒤처져 있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EU는 ‘연구혁신 중심 경쟁력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으며 그 핵심 수단 중 하나가 제9차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이다.
‘호라이즌 유럽’으로 전략기술 주도권 확보하려는 EU…
우리나라는 제3국 파트너로 참여해 연구비 지원은 제한
호라이즌 유럽은 1984년 시작된 EU 통합 연구혁신 재정 프로그램의 9번째 사업이다. 2021~2027년 동안 약 950억 유로가 투입되며, 연구혁신을 정책 목표와 직접 연결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기초과학 중심이었던 과거 프레임워크 프로그램과 달리 디지털 전환, 기후 중립, 산업 경쟁력 강화 등 EU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를 연구과제 설계에서부터 반영하고 있다. 연구 성과의 사회적·경제적 파급효과를 중시하는 ‘미션 지향형 연구’가 대표적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국경을 넘는 협력 구조다. 호라이즌 유럽은 다국적 컨소시엄 구성을 기본 전제로 하며 학계·산업계·공공이 동시에 참여하는 개방형 혁신모델을 정착시켜 왔다. 연구는 개별 국가의 성과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공동자산이라는 인식이 제도 전반에 반영돼 있다.
최근 EU는 호라이즌 유럽을 통해 전략기술 분야에서의 자율성과 주도권 확보를 강화하고 있다. AI, 양자기술, 반도체, 청정에너지 등은 연구 차원을 넘어 경제안보와 직결된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연구혁신 정책은 산업·통상 정책과 긴밀히 연계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호라이즌 유럽은 더 이상 ‘유럽 내부 프로그램’에 머물지 않는다. EU는 연구 역량과 제도 신뢰성을 갖춘 비회원국을 준회원국(Associated Country)으로 참여시켜 글로벌 차원의 연구협력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호라이즌 유럽은 이미 글로벌 연구혁신 질서의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연구자들은 호라이즌 유럽에 제3국 파트너로서 참여해 왔다. 제3국 지위로 한국 연구자들은 유럽 연구자들의 컨소시엄에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EU 예산에서 연구비를 직접 지원받지 못해 국내 재원으로 충당해야만 했다. 또한 일부 전략 분야에서는 조정기관(coordinator) 역할 수행에 제약이 따르는 등 제도적 한계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한국 연구자들은 정보통신, 에너지, 보건, 기후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EU 연구기관과 협력해 꾸준히 참여 기반을 확대해 왔으며, 축적된 협력 경험이 준회원국 지위 획득의 토대가 됐다.
EU는 호라이즌 유럽을 개방형 플랫폼으로 발전시키면서 27개 EU 회원국 외에도 연구 역량과 제도적 신뢰성을 갖춘 비회원국의 ‘준회원국’ 참여를 확대해 왔다. 2023년 7월 뉴질랜드와 2024년 7월 캐나다가 EU와 협상을 통해 준회원국 지위를 획득했고,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재가입 협상을 거쳐 2023년 9월 준회원국으로 복귀했다. 이처럼 EU는 전략적 가치와 상호 호혜성을 고려해 파트너 국가와의 제도적 연계를 강화해 왔다.
한국은 2025년부터 준회원국 지위 얻어
EU 회원국과 같은 조건에서 연구과제 참여, 연구비 수주
한국의 준회원국 참여 역시 장기간의 정책 협의와 협상을 통해 성사됐다. 2018년 12월 EU가 한국의 준회원국 참여를 제안한 데 이어, 2022년 2월 우리 정부가 가입 의향서를 전달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2022년 3월부터 2023년 5월까지 탐색회의를 통해 재정 기여 방식, 연구 윤리 기준, 지식재산권 관리, 데이터 활용 원칙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협의가 진행됐으며, 2023년 5월부터 본 협상 단계에 진입했다. 2024년 9월 협상이 최종 타결됐으며, 그 결과 한국은 2025년부터 필러 Ⅱ(글로벌 도전과 산업 경쟁력) 분야에 준회원국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확정됐다. 이어 같은 해 7월 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EU 간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 협정서가 공식 서명되면서 제도적 절차가 마무리됐다.
이번 협정체결은 연구 프로그램 참여 확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한국의 연구관리 체계와 R&D 제도가 EU의 엄격한 기준과 호환 가능하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며, 한국이 유럽 연구혁신 생태계의 제도적 파트너로 편입됐음을 상징한다. 준회원국 지위 획득으로 한국 연구자와 연구기관은 EU 회원국과 사실상 동등한 조건에서 연구과제 기획과 수행에 참여하고 EU 재원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됐다.
이러한 제도적 전환은 2025년 과제 선정 결과를 통해 초기 성과로 나타나고 있으며, 준회원국 참여가 형식적 지위에 그치지 않고 실제 대형 연구과제 참여와 연구비 수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EU 공동연구, 양적 규모는 작아도 질적으로 우수…
연구 성과가 산업과 정책으로 이어지는 구조 체계화해야
한편 호라이즌 유럽의 준회원국 참여로 인한 기대효과는 단순한 연구 참여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EU 공동연구가 양적 규모에 비해 매우 높은 연구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가 한·EU 첨단기술 협력에 관해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8~2024년 동안 한국과 EU가 공동연구를 통해 생산한 논문 수는 1,446편으로 미국이나 중국과의 협력보다 규모는 작지만, 연구의 질과 영향력 측면에서는 오히려 경쟁력 있는 성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2018~2024년 동안 한·EU 공동저자 논문의 약 45%가 전 세계 상위 10% 피인용 논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같은 기간 한미 공동연구(약 42%)보다 높은 수준이며 중국과의 협력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치다. 단순한 공동연구 참여가 아니라 한·EU 국제 연구 성과의 질적 우수성이 실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러한 성과는 특히 AI와 양자기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해당 보고서는 한·EU 공동연구에서 가장 활발하고 성과가 높은 분야로 AI와 양자기술을 지목하고 있다. 반도체, 고성능 컴퓨팅, 알고리즘, 데이터 기반 기술 등에서 한국의 산업적 강점과 EU의 기초연구·시스템 설계 역량이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호라이즌 유럽이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전략기술 분야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또한 청정기술과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도 협력 잠재력이 크다. 한국은 배터리, 수소, 에너지 저장기술 등에서 산업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EU는 탄소중립정책과 규제 설계, 대규모 실증 경험에 강점이 있다. 한·EU 공동연구는 기술개발을 넘어 향후 국제 규범과 표준 형성 과정에서 양측이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는 연구혁신이 곧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구조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라이즌 유럽 참여는 한국 입장에서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 첨단기술 경쟁환경에서 ‘합리적인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될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과의 협력에 비해 연구 규모는 작지만, 성과의 밀도와 질이 높다는 점은 한정된 연구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EU 역시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고역량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향후 공동연구의 범위와 깊이가 확대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향후 과제는 이러한 협력 성과를 일회성 사례로 남기지 않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중점 협력 기술 분야를 명확히 설정하고 연구자 지원과 기업 연계를 강화하며 연구 성과가 산업과 정책으로 환류되는 구조를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호라이즌 유럽은 단순한 연구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국과 EU가 첨단기술 분야에서 공동의 경쟁력을 축적해 나갈 수 있는 전략적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양극화되는 환경에서 한국과 EU의 협력은 규모의 경쟁이 아닌 질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대안적 협력 모델이 될 수 있다. 한국의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참여가 이러한 협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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